
“모든 존재는 폭력 앞에 몸을 떤다.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사랑한다. 다른 존재 안에서 그대를 보라. 그렇다면 누구를 해칠 수 있겠는가? 어떤 해를 가할 수 있겠는가? 생명 외경을 지닐 때 비로소 우리는 세계와 영적 관계에 들어선다.”
동물에 대한 처우가 엄중한 죄악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범죄와 마찬가지로 단지 인간의 이기심과 무지의 산물이라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 견해에 따르면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는 폭력과 공포는 여러 문제 중 하나일 뿐, 모든 문제의 근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인간이 아닌 동물을 향한 것이므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문제가 돼버린다. 이런 타성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오늘날 최대의 윤리적 과제의 의미를 온전히 볼 수 있다.
◇ 지구촌이 당면한 위기의 근원
소피아(Sophia)는 인간 본성의 신성한 여성성을 뜻하는 단어로 양육하고 돌보고 배려하는 사람의 본성을 일컫는다. 고대 농경사회에서는 양육과 풍요의 여신이었고 인간 내면의 여성적 힘 또는 지혜를 상징한다. 철학이란 단어 Philo+Sophia는 ‘소피아에 대한 사랑’이란 뜻이다. 이 소피아의 억압은 유의미한 관계를 파악하고 맥락을 확장하는 인간 본래의 연민과 지성을 근본적으로 차단한다.
오늘날 지구촌이 당면한 위기의 근원은 무엇일까? ‘분노’다. 그리고 이 분노는 개인 또는 우리 문화의 거대한 그림자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 이 그림자 이론 정립은 정신분석학자 칼 융Carl Jung의 최대 공적 중 하나이다. 그림자 원형은 자아가 부정하고 억압하는 내면의 음침한 어둠을 가리킨다. 하지만 억압돼도 이 그림자는 언젠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알아채기 어려운 방식으로 끊임없이 현실에 자신을 투사한다. 외부 대상에 대한 이 그림자의 투사야말로 가장 위험한 심리학적 실수이자 거의 모든 갈등의 근본 원인이다.
◇ 우리 문화 최대의 그림자
첫째. 하나의 생명체로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던 동물성 음식을 온전한 정신으로 바라보면 필연적으로 고통, 잔인함, 착취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깊이 들여다보길 거부한다. 우리의 내면 깊숙한 본성인 소피아는 육식이 불필요한 일이자 끔찍하고 부도덕한 것임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밥상에서의 양심적 가책으로 인한 회피와 부정의 관습은 우리의 사적 공적 영역에 광범위하게 스며들어 사회의 암묵적 지원하에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무의식적 그림자 및 집단적 죄의식을 형성한다.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은폐하는 동물에 대한 잔인함과 폭력은 단연코 우리 문화 최대의 그림자다.
둘째. 그림자는 우리의 소피아 즉 인간 동물 사회 등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 간의 유의미한 관계를 찾아내는 능력인 지성을 원천적으로 훼손하며 자연 세계에 생명을 주는 성스러운 힘을 향한 새로운 통찰도 불가능하게 한다. 아울러 다른 존재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우리 본연의 연민도 억압한다. 매일 수천만의 동물을 감금·도륙하는 참상을 숨기는 데 받는 스트레스는 스스로를 축소하고 내면의 감수성을 감퇴·마비시킴으로써 점차 자신도 모르게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이, 황폐해진 생태계, 후손에 끼치는 고통과 단절하는 데도 익숙하게 된다.
◇ 모든 문제의 근원인 그림자의 투사
셋째, 그림자는 우리 자신을 용납할 수 있도록 더러운 일을 대신하는 자아다. 그림자는 투사를 통해 폭력을 다른 방식으로 표출하게 만든다. 억누르고 단절할수록 내면의 동요는 더욱 거세져 외부의 희생양에 폭력으로 대응한다. 그림자는 우리가 혐오하기에 적당한 목표물을 만들어 이 외부의 희생양을 본질적으로 악으로 간주하며 공격한다. 차마 직면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육식이 낳은 무자비한 그림자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생태계 파괴, 빈자에 대한 무차별적 착취, 자살 및 중독. 소비지상주의와 전쟁 그리고 오늘날 총체적 문화적 곤경 등의 존재 배경과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는 폭력과 공포는 여러 문제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문제의 근원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폭력의 악순환은 누적된다. 우리는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문화적으로 용인한 육식을 강요함으로써 아이들을 학대한다. 이렇게 상처 입고 자라난 아이들이 또 매일 식사를 통해 양심의 가책 없이 동물에게 상처 입힌다. 동물에게 폭력적인 사람은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림자는 하루 수억의 가축과 물고기의 죽음으로부터 양분을 얻고 우리의 죄의식과 혐오감을 탐하면서 더 대담하고 크게 성장한다. 그림자는 커질수록 더 알아채기 어렵다. 우리의 위장과 혈관 그리고 세포 속에 담겨있는데도 말이다.
이렇듯 동물의 가축화로 시작해 식습관으로 인해 탄생한 거대한 그림자는 자본주의와 현대사회의 토대와 심리적 기틀은 물론, 오늘날 제도와 기술의 허울 속 깊은 곳에 더 모습을 숨기며 투사와 부정을 통해 끊임없이 폭력을 사주하고 요구하며 광범위한 파괴력을 행사하고 있다. 동물을 식용화하는 데 필요한 본연의 지성과 연민 억제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생태계와 온갖 생명체를 파괴하는 일종의 내장된 정신장애와 같다. 폭력의 악순환은 이 식용동물을 향한 무자비한 폭력을 종식하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지구촌이 당면한 위기의 근원인 분노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거대한 고통과 죽음의 쳇바퀴에 대해 ‘알아차림’
지구는 자기 치유 기능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단지 우리가 지구에 지나치게 부담을 준 것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지구를 지나치게 오염시키고 무엇보다 살생의 업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살생에서 빚어지는 이 나쁜 집단적 응보는 진화를 요구하는 우주의 전체 리듬과도 충돌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이 세계를 오케스트라에 빗대면 지성은 연주자 하나하나가 더 큰 전체로부터 피드백을 받으며 유의미한 연결 방식으로 전체를 섬겨 연주에 기여하도록 돕는 것과 같다. 이 상호의존성의 경험을 통해 환희가 솟아올라 전체를 섬기지 않거나 피드백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세포는 자기 본위적인 세포로 남아 결국 위험하고 해로운 암종이 되어 소멸할 수밖에 없다, 지구는 진화냐 소멸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다.
우리 문화와 사회에 드리워진 거대한 고통과 죽음의 쳇바퀴에 대해 알아차리면 지구는 원래 상태로 돌아가 스스로 회복하고 재생하여 전체 우주의 리듬과 조화하며 다시 생명을 유지할 것이다. 우리 문화의 그림자를 알아차리는 것 즉 생태적 감수성과 연민의 회복이야말로 개인과 사회, 지구를 치유하는 최우선이다. 단지 우리의 행동을 되돌리기만 하면 된다. 비거니즘. 사랑과 자비의 에너지가 지구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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