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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비건일지] "완벽한 비건 한명보다 어설픈 비건지향인 열명이 낫다"

평소 고기가 없는 식단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육식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러다 영화 ‘옥자’를 보고 채식을 시작해보자 마음을 먹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육식을 끊는 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육식을 사랑했던 나를 위해 약간의 숨 쉴 곳을 마련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이에 베지테리언 단계 중 폴로 베지테리안이 되기로 결심했다. 폴로베지테리언은 붉은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 단계다.

 

주변인들에게 채식을 시작한다는 것을 알렸다. 대부분의 반응은 “다이어트를 하려면 차라리 운동을 해라”였다. 여기에 기자는 “옥자를 봤는데 공장식 축산업이 얼마나 환경에 안 좋은지 아니?” 등 길고 긴 부연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설명에 지쳐버렸고 몇몇 주변인에게는 채식한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첫날 점심은 제육볶음이 나왔다. 제육볶음을 받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도토리묵과 시금치나물, 김치, 진미채와 콩나물국으로 점심을 해결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오후 시간 더부룩하거나 배가 아프지 않아 만족스러웠다.

 

 

 

저녁은 가까운 분식점에 들려 참치김밥을 포장했다. 집에 와서 보니 참치김밥에도 햄이 들어있었다. 하나씩 빼고 먹는 것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지만, 햄을 빼고 먹으니 돼지를 살렸다는 뿌듯함이 커졌다.

 

 

사내식당에는 육류가 나오지 않는 날이 없었다. 거꾸로 생각해 이렇게나 매일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많이 먹었었나 싶었다. 똑같은 6000원인데 메인반찬을 못 먹는다는 게 점점 억울해졌다. 회사 근처 잔치국숫집으로 향했다. 잔치국수에는 당연히 고기는 없을 거라 생각하고 물어보지도 않고 시켰는데 다진고기가 고명으로 올려져 있었다. ‘육수에도 고기가 들어간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이제는 주문할 때마다 고기가 들어갔는지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반찬을 사러 단골 반찬가게에 들렀다. 사장님 혼자 운영하시는 가게이기에 반찬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등 표기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았다. 사장님께 일일이 “고기가 들어있나요?”하며 귀찮게 했다. 사장님은 “한약 먹냐?”고 물어봤고 기자는 채식한다고 말을 못 하고 “그렇다”고 얼버무렸다. 매번 반찬가게에 방문할 때마다 한가득 구매했는데 채식을 시작하고 나서는 나물, 된장국 등 몇 가지로 추려졌다.

 

친구들과 모인 어느 저녁, 기자 때문에 다른 메뉴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불편해서 삼겹살을 먹자는 일행 의견에 쿨한 척 따라나섰다. 고깃집을 향하면서 ‘고기만 굽고, 야채만 먹으면 된다’ 다짐했다. 익숙한 고기 냄새와 지글지글 굽히는 고기 비주얼에 나는 KO패 당했다. 정신줄을 놓았다는 게 맞는 표현 같다. 하지만 외식을 마치고 집에 와서 이내 후회했다. 아랫배가 묵직하니 아프고 속이 더부룩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먹을 땐 맛있었지만, 채식이 훨씬 낫다는 생각하게 된 날이다.

 

폴로베지테리언이 된 지 2주 차, 기자는 정크비건에 가까웠다. ‘채식=풀’이라고 생각했는데 샐러드를 전혀 먹지 않고도 채식을 이어가고 있었다. 주로 비건 라면과 비건 만두를 먹었고 닭은 몇 마리나 잡았는지 모를 정도다. 이대로라면 처음 채식을 다짐했던 취지가 무색해진다.

 

 

채식주의를 위한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던 중 ‘도미니언’을 봤다. 너무 잔혹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고백하자면 아직 도미니언을 끝까지 꼼꼼하게는 보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잔인한 장면이 나오면 건너뛰기를 눌러버렸기 때문.

 

 

특히 닭을 도살하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기절하지 않은 닭이 고통스럽게 파닥거리는 모습과 그 닭의 목을 썰어내는 모습이 가감 없이 담겼다. 치킨을 줄여보자고 다짐했다. 일주일에 두 번만 먹고 나머지는 페스코베지테리언이 되기로 했다.

 

 

점심시간에는 간단한 도시락을 싸다닌다. 아침에도 금방 준비할 수 있는 메뉴로 준비한다. 샐러드와 고구마 삶은 계란 등이다. 한동안은 아삭한 채소 맛이 좋아 드레싱을 바꿔가면서 샐러드를 즐겼다.

 

몸무게에도 변화가 생겼다. 절대 빠지지 않던 살이 빠진 것. 어딜가나 살이 빠졌다는 말을 들었다. 또 채식을 시작하고 변비, 과민성대장증후군도 없어졌다. 한 달에 한 번 괴롭히던 생리통도 거의 없었다. 건강하고 싶어서 시작한 채식은 아니었는데 ‘일거양(兩)득’, 아니 ‘일거다(多)득’이다.

 

 

하지만 채식을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나자 모든 음식이 질려버렸다. 샐러드, 삶은 계란, 고구마, 비빔밥 등 매일 비슷한 메뉴를 돌려먹던 게 화근이다.

 

새로운 채식 메뉴를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채식 오픈 채팅방을 찾았다. 채팅방에 입장해 보니 채식인 3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대화창은 채식 선배들이 추천하는 관련 자료와 영상, 비건식당 추천 등으로 훈훈했다.

 

 

채팅 중 잠실에 있는 제로비건이라는 채식 식당을 추천받았고 점심시간 방문했다. 육류 없이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던 메뉴 곰탕, 해장국, 감자탕이 비건 버전으로 준비돼 있었다. 채식 입문자에게는 꽤나 신세계다. 특히 새송이강정이 맛있어서 계속 손이 갔다. 며칠 뒤에도 우연히 잠실에 들렀다가 해당 식당에 방문해 새송이 강정을 포장했을 정도.

 

 

SNS를 통해 알게 된 비건 밀키트도 주문했다. 초보 비건의 채식 생활에 든든한 힘이 돼주는 플랫폼이다. 10~15분 내 조리가 가능해 간단하게 저녁준비를 마칠 수 있다. 매주 새로운 메뉴를 출시해 질릴 틈이 없다.

 

문제는 가격이다. 뭐든 채식 옵션이 붙으면 가격이 올랐다. 대체육도 그냥 고기보다 1.5배는 비싸고 비건 식당도 똑같은 메뉴를 비교해 봤을 때 2배 가까이 차이가 나기도 했다. 밀키트도 가격은 7000원으로 적당한 듯 보였지만 배송비가 붙으면 한 끼에 만 원이 훌쩍 넘었다.

 

비건식이라면 고기를 뺀 음식인데 가격이 비싼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격 면에서도 경쟁력을 갖춰야 채식인구가 늘어날 수 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기자는 아직 누군가에게 채식주의자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는 없다. 폴로베지테리언과 페스코베지테리언 사이에서도 가끔 정체성을 잃는다. 샌드위치에 포함된 햄을 못 본 척 얼른 먹어버릴까 망설이고 고집에서 풍기는 냄새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채식 관련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면서 다짐을 되새긴다.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라는 육식 명언이 있듯 채식에도 명언이 있다. “한 명의 완벽한 비건보다 열 명의 비건지향인이 낫다”는 말이다. 앞으로도 완벽한 비건은 아닐지언정 비건지향인으로 지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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